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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평창읍 전설 (남병산&조판서 묘지)

      2017.09.06 by _(Editor)

    • [이야기] 평창읍 전설 (고목나무 4형제)

      2017.09.06 by _(Editor)

    • [이야기] 평창읍 전설 (절목&항물내기)

      2017.09.06 by _(Editor)

    • [이야기] 평창읍 전설 (장바위굴)

      2017.09.06 by _(Editor)

    • [이야기] 평창 대화면 전설 (처녀봉과 샘)

      2017.09.06 by _(Editor)

    • [이야기] 평창읍 전설 (왜담)

      2017.09.06 by _(Editor)

    • [이야기] 평창읍 전설 (여미륵)

      2017.09.06 by _(Editor)

    • [이야기] 평창읍 전설 (약수탕)

      2017.09.06 by _(Editor)

    [이야기] 평창읍 전설 (남병산&조판서 묘지)

    남병산&조판서묘지 평창과 방림, 대화를 경계로 하고 있는 하안미리 남병산(1149m)의 800고지에 조판서 묘지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조선시대 병조판서를 역임한 용인인 조판서가 죽자 묘지를 정하여야겠기에 지관에게 물으니 남병산에 묻어야 좋으며 그렇게 하면 50년 후에 그 산에서 은이 산출될 것이라 하였다. 맏아들이 그 위치를 알 수가 없어 북간도로부터 함경북도를 거쳐 강원도 금강산 등 사방을 헤매었으나 남병산을 찾을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대관령을 넘어 이곳 하안미리 사초거리에 와 여장을 풀고 일박을 하게 되었다. 이튿날 마을 청년 한 사람이 "야! 남병산에 나무하러 가자"고하는 소리를 들은 맏아들이 남병산이 이곳에 소재하고 있음을 알아내고 선친의 묘자리가 될 만한 곳을 찾아보니 과연 명당으로 여겨지기..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24

    [이야기] 평창읍 전설 (고목나무 4형제)

    고목나무 4형제 옛날 옥황상제께서 인간 세상을 굽어보시다가 복을 받을만한 착한 마을이 있어 이 마을에 약수를 내리고, 마을을 지키고 보살피게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 4형제를 내려 보냈다. 그런데 마을을 두루 살펴보니 배와 같은 형국이므로 옥황상제는 아들 4형제에게 고목나무가 되어 배의 삿대 노릇을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큰 아들은 길가에 섰고, 둘째 아들은 한뱀이들에 섰으며, 셋째 아들은 안구렁이들에, 그리고 넷째 아들은 자지붕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섰다. 어느덧 세월이 흘려 겨우 한 인물이 나려 할 무렵에 삿대 노릇을 하던 4그루의 고목나무 중 2그루가 늙어 쓰려져 2개의 삿대가 없어지니 배가 제대로 움직여 나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이제까지 약수리에서 인물이 나오지 않고 마을의 발전..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21

    [이야기] 평창읍 전설 (절목&항물내기)

    절목&항물내기 옛날 마지 본마을 골짜기에 큰 절이 있어 골 이름을 절골이라 했는데 그 큰 절이 어느 때 부터인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깨어진 기왓장만이 남아 있다. 어느 날 이 절의 대사가 동자승을 데리고 이웃 영월땅으로 시주를 가던 중에 동자승이 몹시 목이 말라 주저앉자, 대사는 조금만 참고 산마루에 이르면 물이 있다고 달래어 갔으나 물이 보이지 않아 동자가 다시 물으니 대사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다 꽂고 염불을 외우자 그 자리에서 돌연 샘물이 솟아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는 지금도 물이 나오는데 작은 술잔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으며 부정한 사람이 마시려고 하면 물이 나오지 않거나 물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20

    [이야기] 평창읍 전설 (장바위굴)

    장바위굴 임진왜란 때 왜병이 쳐들어오자 평창읍 주진리 부근 마을 주민들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아무 준비도 못한 채 마을에서 1km쯤 떨어진 천연동굴로 피난하였다. 피난한 주민들이 집에 있는 장 조차도 가져오지 못해 끼니를 잇지 못하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한 노파가 장을 가져오기 위해 몰래 마을을 내려갔다. 이 때 왜병들은 마을이 텅 빈채 사람의 그림자 조차 볼 수 없자 사방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숨어 내려오던 노파를 발견하고 칼을 갖다 대며 마을 사람들이 숨은 곳을 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거듭한 끝에 결국은 숨은 굴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굴에 도달한 왜병들은 섶을 쌓아 불을 질러대니 동굴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일부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항복하였지만 일부지사와 병약자들은 동굴 안에 남은 채 타 죽..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18

    [이야기] 평창 대화면 전설 (처녀봉과 샘)

    처녀봉과 샘 대화면 신리에 있는 처녀봉은 딴봉이라고도 불리워 졌다. 옛날 처녀봉 봉우리에 샘이 솟았는데 그 샘을 휘저어 흐려 놓기만 하면 밥짓던 아주머니도 밥짓다 말고 바람이 났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는 물이 용솟음치는 소였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비슷한 전설이 방림면 방림리 남산 두리봉 처녀굴에 전해지고 있다.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15

    [이야기] 평창읍 전설 (왜담)

    왜담 평창읍에는 많은 돌무지들이 있는데 이 돌무지들은 대부분이 임진왜란때 쳐들어 온 왜병과 관련된 전설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때 평창까지 쳐들어 온 왜병은 가는 곳마다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여만리에 있는 왜담은 당시 왜병을 막기 위해 우리 의병이 노성산성(魯城山城)에 방어진을 치고 대치하자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할 때 주변의 돌을 주워다 진지로 구축하였던 담이라고 전해지는데 근래까지 형태가 남아 있었으나 1981년 제방 축조공사를 할 때 이 돌들을 날라다 썼다고 한다. 공사를 하던 중에 곳곳에서 부러진 창 끝과 화살촉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일명 '에담' '되담'으로도 불리워졌던 이 돌무지의 자리는 600여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10

    [이야기] 평창읍 전설 (여미륵)

    여미륵 평창읍에서 남으로 1km 정도 영월행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길 옆 우측 산비탈에 미륵불이 서 있는 것이 보이며 그 주위에 1m 정도의 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옛날, 여미륵이 마주 보는 강건너 종부리에 여러 대를 걸쳐 부유하게 살아 오던 황씨 일가가 있었다. 주인 황씨는 구두쇠로 유명하여 아무리 끈질긴 거지라 하더라도 이 황씨네 문 앞에서는 그냥 돌아가야만했었다. 어느 해 봄 백발의 노승 한 사람이 황씨 집을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 이에 황부자가 "원 별 미친 놈의 중을 다 보겠군, 내가 언제부터 덕으로 살았나?" 하며 한마디로 거절하자 노승은 황부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황부자님, 시주는 그만 두시고 소승이 지금 몹시 시장하오니 요기나 조금 시켜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은혜를 갚지 못하..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08

    [이야기] 평창읍 전설 (약수탕)

    약수탕 옛날 평창읍 약수리에서 솟아나는 샘이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게 효험이 있어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물에 목욕을 하러 오는 사람이 길을 메우고 온통 혼란을 빚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때로는 문둥병 환자가 끼어 와서 이 물에 목욕을 하거나 먹으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아서 가기도 하니 이에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한꺼번에 들이 닥쳐서 이 마을은 문둥이 등살에 여간 혼란하지 않았으며 한 때는 밥을 빌어먹는 문둥이 때문에 주민들이 끼니마저 걸러야 할 처지에 놓여지기도 했다. 주민들이 약수 때문에 날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이 마을에 살고 있던 기운 센 장사가 절박해진 마을 형편을 알고는 큰 바위를 들어 약수탕을 덮어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간은 바위에 눌려 물이 흐르지 않더니 이후 묻어 놓은 바위 틈..

    카테고리 없음 2017. 9. 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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