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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평창 봉평면 전설 (태기산과 태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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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_(Editor) 2017. 9. 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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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과 태기왕


태기산은 평창군 봉평면과 횡성군 둔내면에 연해 있는 해발 1261m의 산으로 이 산꼭대기에는 태기산성이라고 불리워지는 성터가 남아있고 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부족국가시대에 왕 태기가 춘천지방에서 다른 부족에게 쫓기어 원주로 옮겼다. 이에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강릉지방의 최후의 결판을 낼 전투를 하려고 봉평 德高山(즉 태기산)에 자리를 차지하여 산성을 쌓아 만들고 병마를 훈련시켰다. 


태기왕의 부하 중 와의 두 장군이 있었다. 삼형제 장군은 삼형제봉에 진을 치고 군사 3백명으로 일대를 이루고 호령 장군은 호령봉(현 會令峰)에 군사 5백명으로 진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진부면 도주골(현 道師里)로부터 예국의 대국이 쳐들어 와 호령장군과 그 밑의 군사들을 전부 멸하고 태기산으로 몰려 왔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삼형제 장군은 진을 버리고 군사를 몰아 태기산성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산성이 함락되고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고는 태기왕을 데리고 산성을 벗어나 급히 피난을 하였다. 태기왕은 워낙 당황하였는데다 적군의 추격이 급하여 피난하던 중 玉 臺(현 안흥동)에서 옥새를 잃어 버리고 王 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人(현 綿溫)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王을 호위하던 군사들이 전멸하여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삼형제장군은 단신으로 왕을 모시고 白玉浦(백의 장군이 왕의 옥체를 업고 물에 빠졌다 하여 백옥포라 부름)에 투신하여 최후를 마쳤다. 태기왕에 얽힌 또 하나의 지명은 왕이 無日里(현 武荑里)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었다 하여 무일리라 불렀는데 후세에 해가 없는 마을은 있을 수 없다 하여 무이리로 고쳤다. 한편 횡성군 둔내면에도 태기왕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봉평면의 것과는 다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옛날 삼한의 한 나라였던 辰韓이 새로이 힘있게 나타난 신라와 투쟁을 계속하던 중 三浪津 전투에서 대패하게 되었는데 이 때가 신라는 한창 흥기할 때이고, 진한은 태기왕이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였다. 삼랑진 전투에서 대패하고 국토를 빼앗긴 태기왕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이곳 덕고산에 와서 분노와 한을 안고 재기의 노력을 하였다. 그는 실지 회복을 노리며 군사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고 화전을 개간하며 군대를 훈련하기를 4년간 이나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염탐되어 신라군의 재추격을 받게 되었다. 


진한군은 이 산성을 거점으로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웠으나 끝내는 또 참패를 당하였으며 진한도 멸망하고 태기왕도 덕고산에서 최후를 마쳤다. 이 뒤로부터 태기왕의 이름을 따서 덕고산을 태기산이라 부르고 그 성터를 태기산성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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