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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 낸 영웅일까

뉴스/평창뉴스

by _(Editor) 2015. 3. 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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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출신, 친일행적 덮으려 유관순 신격화 해 


[평창신문 편집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으며,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이 지옥같은 식민지 지배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다.”


유관순 열사가 경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본 법관을 향해 던진 말이다.


유관순은 3월1일을 상징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유관순은 1902년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겨우 17세 나이에 서대문 감옥에서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해 사망했다. 일제 강점기의 쓰린 상처다.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 학생이었던 그녀는 천안군 목천면에서 3.1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4월1일(음력 3월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돼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운동 참여를 설득했다. 


유관순은 4월1일 수천 명의 모인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과 이소제는 시위 현장에서 조선총독부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살해됐다. 속장 조인원 등도 총격으로 부상을 당했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해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고문을 받았으나,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결국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로 투옥돼 곧 공주경찰서로 감옥으로 이감됐다.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으나, 1919년 5월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 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같은 해 6월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했다. 유관순은 경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했다. 



다음은 유관순이 경복심법원 재판 당시 한 말이다.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 왜 제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 죄가 되느냐? 왜 평화적으로 아무런 무기를 갖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해대어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 무고한 수많은 목숨을 무참하게 빼앗을 수 있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게 있는 것이 아니냐?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으면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이 지옥같은 식민지 지배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다. 무슨 권리로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나는 죄인이 아니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순간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고 만세를 부를 것이오. 나는 대한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당신들이 나를 죄인으로 몰고 있을 뿐이오. 나는 도둑을 몰아내려 했을 뿐이오. 당신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았는데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유관순은 결국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고, 복역 중에도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칭하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해 형기 3개월을 남긴 1920년 9월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유관순이 사망한 이틀 뒤,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이화학당의 외국인 교직원들이 유관순의 옥중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마지못해 월터교장에게 시체를 인도했다. 


친일세력이 이용한 ‘유관순’ 


1946년 이화여교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은 찾았다. 당시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고의 교장으로 있던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기념사업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이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을 하면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해 조선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서며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그들은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죄과와 친일경력을 가릴 방패막이를 삼으려 했는데, 이를 위해 그들이 선택한 애국열사가 유관순이었다.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박인덕과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은 유관순을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신화적인 여성영웅인 잔 다르크에 비유했다. 유관순을 잔다르크에 비유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 각인시켰다. 3·1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00명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유독 유관순만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는 없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한 유관순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평가도 있다.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박인덕, 전영택, 일부 기독교인들의 선전도구로 이용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을 근거로 유관순 열사는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는 도구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하면서, 2011년에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라는 책을 통해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개신교 세력에 대해 폭로하고 유관순은 개신교계의 친일 전력을 덮어주는 동시에 선교 전략에 활용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현재 이 문제와 관련해 각 개인과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상이하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유관순은 국가를 위해 본인의 목숨을 희생했다는 점이다. 그녀의 이름 세 글자를 기억해야 할 이유다. 


<자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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