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특별한 평창미술작가 세 남자의 전시회

뉴스/평창뉴스

by _(Editor) 2022. 7. 19. 21:17

본문

300x250
반응형

평창군에서 유명한 미술작가로 알려져 있는 권용택, 박영복, 이선열 세 작가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고향이 모두 수원이고, 두 번째는 20여년 이상 평창군에 귀촌하여 정착한 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미술작가이며, 세 번째는 초등학교 또는 중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인연을 간직한 평창미술작가 세 남자가 수원시립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먼 산을 머금고라는 주제로 세 작가의 작품들로 기획된 전시이자,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생명력 넘치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특별한 전시회를 이달 19일부터 912일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갖는다.

 

권용택, 박영복, 이선열 작가는 1960년대부터 수원으로 유입된 미술 교사들에 의해 기초 데생 수업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고, 수원에서 청장년기를 보내고, 천예의 자연을 간직한 평창군에서 각자의 미술 고유 영역을 완성해 오고 있다.

 

또한, 각자의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평창의 지역작가들과도 활발히 교류하고, 미술교육을 추진하며 신규작가들도 양성해오고 있다.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평창에 귀촌하여 본인의 영역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특별한 평창미술작가 세 남자의 앞으로의 행보와 작품이 주목된다.

 

본지는 권용택 화백의 작품과 평론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았다. 

 

권용택 화백
권용택 화백 백두대간 평창돌.나무위에 아크릴 2022년작

 

전시리뷰

먼 산을 머금고

2022. 7. 19 ~ 2022. 9. 12, 수원시립미술관

 

최형순(미술평론가)

 

1980년대 미술 동인 <새벽>을 주도한 작가 권용택이 이번 전시에 보여주는 것은 돌 그림이다. 말 그대로 캔버스가 아니라 진짜 돌에 그린 그림이다.

 

돌 그림은 크기에 비해 무겁다. 그리려는 그림을 규모 있게 확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미술의 전개로 보자면 한 자리에만 고정된 벽화를 대신하여 옮길 수 있는 그림, 즉 타블로(tableaux)가 나온다. 돌판이 아니라 목판과 같이 옮길 수 있는 타블로는 결국 무게를 더 줄인 캔버스가 대부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권용택은 이런 회화의 발전 역사에 역행하는 작업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아는 권용택은 분명한 메시지와 힘을 가진 빠른 필치로 바로 정곡으로 다가가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여기는 연무동> 같은 개발 현장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현장감 있게 다뤘다. 물에 대해, 풀꽃과 들과 산을 그릴 때도 환경문제 의식은 중요하게 개입되었다. 장대한 역사를 좇아 고구려, 발해의 기상도 백두대간의 힘에 연결해 담았다. 돌 그림은 그런 맥락에서 흡족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돌아보면 최초의 그림은 돌 그림이었다. 몇백 년이나 기껏 몇천 년의 타블로나 캔버스보다 알타미라나 라스코, 인도네시아 동굴벽화처럼 수만 년의 유구한 세월을 견뎌온 그림은 역시 돌에 새긴 그림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서구 교육에 반하는 태도, 고도의 자본주의보다 생태주의자인 작가에게 어울리는 것은 돌 그림이지 않을까.

 

우리는 조각으로 만든 돌덩어리를 무겁다고 하지 않는다. 돌 조각이 당연히 무겁다면 그림을 담은 돌이 그림이라고 무겁지 않을 수는 없다. 미켈란젤로가 돌덩이 속에서 수많은 명작을 꺼냈듯 권용택은 돌덩이 속에서 세상의 모든 풍경을 읽어 낸다. 여기서 권용택이 조각가인지 화가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그는 경계를 넘을 줄 아는 비범한 예술가다. 돌의 생김이 첩첩이 늘어선 봉우리가 되고 붓질이 눈 쌓인 능선의 수목으로 산하를 이루면 돌덩이도 겨울 산하의 웅장한 자연이 된다.

 

또 하나의 스펙트럼은 시간이다. 그것을 담은 작품이 전시 공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돌덩어리로부터 자연의 충격과 풍화 속에 드러난 주름이 마침내 화가에게 말을 걸어 그림이 된다. 자연과 작가의 만남 속에 이루어진 예술의 생성이다. 예술이 되었던 돌은 깨지고 흩어져 작은 파편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결국 생성과 소멸 속에 예술가의 흔적이 잠시 개입될 뿐 시간의 주인은 자연임을 보여준다. 그것을 일컬어 작가는 돌의 표정이자 작품이 되기까지 생성으로부터 소멸의 과정을 보여주는 생태주의라고 설명한다. 작가관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