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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혜진 시인] - 일상을 그리는 도화지10 - '가을 속으로 걸어간 여자’

뉴스/평창뉴스

by (Editor1) 2020. 3. 16.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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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억새 숲으로...

우리나라만큼 사계절이 명확한 나라도 없다.

절기마다 역할분담은 정해져 있고, 어느 한 계절 소홀히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사람들은 봄과 가을에 몸살을 앓곤 한다. 그야말로 계절을 앓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 인간에게 그런 감성이 없다면 조금은 삭막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굳히며 필자도 가을 속으로 떠나본다. 가을은 모든 것이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지만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조락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에는 모든 것들이 성숙하게 보인다. 아니, 느껴진다는 표현이 옳겠다.

길섶 간들거리는 억새 한줄기까지도 성숙하게 다가온다. 문득 이 가을, 속을 말갛게 비워내고도 의연하게 서 있는 억새 숲에 안겨보고 싶었다.

그 품에서 나도 비워내는 지혜를 배우고 싶었다.

하늘이 높아지는 시월의 어느 저물녘 카메라를 들고 억새 우거진 민둥산을 찾았다. 가까운 이웃 마을에서 마음으로만 바라보았던…, 가까이 있었기에 찾아가기에 소홀했던 그곳 억새 둥지.

늘 혼자 다니는 여행이라 더욱더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주변에 사시는 분에게 산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듣고 핸들을 돌렸다. 조금은 늦은 시간이라 서둘지 않으면 산에서 어둠을 맞게 될 것 같아 주차지에 차를 세우고 부지런히 정상을 향해 걸었다. 자연의 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친구 같다. 사는 곳이 어디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저 반갑고 정겹다. 출발은 혼자였지만 짧은 순간 정상까지 오른다는 목적지는 같은 사람들이 어울려 각자 정담을 나누며 오르는 산행길.

드디어 민둥산 정상이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하얗게 손을 흔드는 억새 숲에 들어 허락 없이 그들의 삶에 잠시 동반하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분께 부탁하여 억새 품에 안긴 내 모습도 한 컷 남기고….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 그리고 가을 산은 벅찬 가슴을 떨리게 한다.

산의 품에 안겨 마음껏 응석을 부려보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올라오는 분들을 만나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듣고 난 가슴이 뭉클했다. 시각, 청각 장애가 있으신 분들이었다.

어느 재활원에서 오셨는지 단체로 오르시는 분 중에는 부부도 있었고 또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분들도 있었는데 시각장애가 있는 부인을 남편이 부축하며 한발 한발 오르던 장면과 그들의 대화는 지금까지도 내 귓전을 맴돈다.

어느덧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시울 붉게 적시는데 절반도 오르지 못한 그들을 바라보며 자꾸만 나의 발걸음은 늦추어지고 시선은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되면서도 왠지 모를 아련한 행복감이 내 혈관을 관통하고 흐르는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들이 억새였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한 걸음씩 조심조심 내어 딛는 그들이야말로 마음을 말갛게 비워낸 억새였다.

차에 올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라고 묻는 전형적인 조선의 남자에게

"당신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라고 목소리 톤을 깔며 대답하자

"아침에 봤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라고 다시 묻는다.

난 민둥산에서 있었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오늘 이곳에 오르길 잘했다고 말하자 남편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운전 조심하고 얼른 돌아와서 많이 보란다. 적당하게 땀방울 맺힌 전신을 바람이 상쾌하게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아, 행복하다.

가을하늘처럼 청아한 행복이다.

노을빛 수줍은 행복이다.

행복은 늘 우리 주변에 서성거리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는 풋풋하고도 상쾌한 가을바람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니, 가공되지 않은 모습으로 하늘과 맞닿은 가을산 한자락 차지하고 앉아있는 바위이거나, 연초록 이파리 곁에 작게 핀 가녀린 물매화 한 송이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 강원도민일보 '행복매거진' 창립 호에 발표

 

  : 권혜진

 · 문예사조 신인상

 · 8회 강원문학 작가상

 · 시집괜찮은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  평창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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