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침묵과 반성 사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오늘 내가 말하는 이유
나는 불교 신자다.
부처님과 그 제자를 욕하면 큰 죄를 짓는다는 경책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늘 침묵해왔다.
혹시라도 나의 비판이 어리석은 업이 될까 두려웠고, 불자의 도리를 어기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나 자신을 반성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훈계할 일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더 아팠다.
그 딜레마를 안고 살아오던 어느 날, 큰스님께 조심스레 내 고민을 말씀드렸고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그 사람을 위한 진실한 조언이라면 괜찮다.”
그 말씀은 지금도 내 마음에 등불처럼 남아 있다.
오늘, 그 등불을 따라 한 걸음 내딛는다.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20년 전, 나는 한 사찰의 선수련회에 참가하며 참선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불교는 ‘자기 안의 고요’로 들어가는 길이라 배웠고, 그 고요는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더 빛나는 것이라 믿어왔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 지역에도 누구나 갈 수 있는 선방, 대중의 명상처가 생기길 기대했다.
그러나 월정사는 20년 동안 너무나 바쁘게 달려갔다.
동계올림픽, 문화올림픽, 각종 국제행사…
건물은 확장되었고, 규모는 커졌다.
그러나 그 안에 ‘주민을 위한 고요’는 있었을까?
스님들의 선원은 생겼고, 명상센터도 생겼지만
주민이 그곳에 들어가려면 10만 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물론 시설 유지에 비용이 드는 것은 알지만,
이 공간이 과연 대중을 위한 명상 공간인지,
공공 예산의 취지에 부합하는 공간인지, 묻고 싶다.
우리는 왜 참았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우리의 세금으로 지어진 시설,
우리의 삶터가 희생된 대가로 이루어진 개발.
그 모든 기반 위에 선 지금의 종교시설은
진정으로 공공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불교는 자비다.
자비는 나누는 것이고,
나눔은 문턱이 없어야 한다.
나는 이제 침묵을 멈추려 한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것이 공공을 위한 진실한 조언이라면, 부처님도 허락하시리라 믿는다.
이제는 우리 모두 묻자.
누구를 위한 명상이고, 누구를 위한 사찰인가.
모든 불교사찰이 그런것이 아니다. 지금도 도심 속 사찰에서 지방의 큰 사찰에서도 참선이나 명상은 대중화되고 있고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이 더 많아지고 있다. 큰스님들은 대중을 위해 스스로 강의를 하시며 부처님 가르침의 길을 안내해주고 계신다.
그런데 지역에 이렇게 좋은 사찰이 있음에도 부처님의 수행을 할 만한 공간, 사찰에서의 지도가 없다는 것은 지역주민으로써 참 슬픈 일이다.
공공의 예산을 받는 사찰임에도 대중을 위한
열려있는 수행, 부처님의 수행과 가르침을 나누지 못하는
사찰은 반성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신라시대에 불교가 쇠퇴한 이유를 되새기고 스스로 자정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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